여기서 꽁까이라 함은 베트남 처녀를 일컫는 말입니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었던 1970년대, Jim은 베트남 전쟁에 파병이 되었던 미 공군 병사였었습니다. 당시 그는 아름다운 베트남 여성을 만났었고 서로 사랑을 불태웠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이 베트남에서 철수를 하면서 그들의 관계는 사실상 단절이 되었던 겁니다. 그나 45년이 흐른 지금 Jim은 그녀를 단 하루라도 잊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Jim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8500 마일이라는 먼거리를 여행을 하면서 그녀를 찿기로 결심을 한겁니다.
이러한 아름다운 이야기가 Jim이 사는 지역에서 알려지기 시작을 하면서 미 굴지의 언론이 Jim과 인터뷰를 시도를 하면서 미국 사회에 알려지면서 많은 미국인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선사를 하고 있는데요, 그래서 그 잔잔한 감동을 여러분과 함께 하고자 나름 묘사를 해보았습니다. 화보에 등장을 하는 인물은 당사자인 Jim과 그의 옛 여인이었던 누엔의 모습입니다. 그런 꽁까이가 세월이 흘러 아름다운 꽁까이에서 초로의 노인이 된겁니다!!
관절염으로 불편한 다리를 이끌며 호텔방을 배회를 하며 짐은 어쩔줄을 모릅니다. 지난 45년 동안 헤어졌었던 옛사랑을 만난다는 흥분감에 젖어 앉았다 서다를 반복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지금 갖는 흥분감을 동석을 한 기자에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리고 바로 문에서는 노크 소리가 나는 겁니다.
그 문뒤에는 자신이 1970년 7월 사이공에 본의 아니게 홀로 남겨 놓았었던 체구가 자그마한 어느 여인이 서있었던 겁니다. 주점의 여종업이었던 그녀는 헤어질 당시 그녀는 짐에게 임신 사실을 알렸지만 당시 짐은 그녀의 말을 맏지를 못했던 겁니다. 미국이 베트남에서 철수를 하고 믹구으로 귀환을 한 짐은 지난 45년 동안 그녀를 한시라도 잊어 보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그녀가 이제는 옛사랑과 함께 하려는 순간이 다가오는 겁니다.
당시 21세 였었던 미 공군 소속으로 사이공 인근 지역인 탄손 공군 기지에 복무를 하고 있었습니다. 장기간 베트남 복무후, 그는 미국 미네소타로 복귀를 했었고 고엽제로 인한 건강상의 문제도 있었고 공무원으로 재직을 하며 두번 결혼으로 인한 아들이 있었지만 그는 그의 첫사랑을 잊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2005년 두번째 결혼이 막을 내리면서 그는 자신의 첫사랑을 찿기로 결심을 하고 자신이 기억을 하는 이름인 린 호아 라는 가명을 쓴 옛사랑을 수소문 하기 시작을 한겁니다.
그는 바로 인터넷을 써치를 시작을 했었고 당시 미군과 베트남 여성 사이에서 출생한 Amerasian 아이들을 찿는 그런 자선 단체에도 도움을 요청을 한겁니다. 베트남 전쟁 동안 미군과 베트남 여성 사이에서는 약 10만명의 아이들이 출생을 했었습니다. 대부분 미국인 가정에 입양으로 미국으로 온 경우가 많았고 이러한 정보를 발판으로 그는 지난 2012년 이래로 베트남을 5차례 찿았고 지역 신문을 통해 옛사랑을 찿는다는 광고도 꾸준하게 내보냈었던 겁니다.
지난 봄, 미 언론사인 워싱톤 포스트는 전쟁 후, 미국이 남기고 간 Amerasian을 찿는 프로젝을 시작을 하면서 짐은 그러한 프로젝의 일환으로 과거 누엔과 함께 사랑을 나누었었고 처음 누엔 자신이 짐의 아이를 임신을 했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은 월 5불 짜리 월세를 냈엇던 아파트를 찿으면서 본격적으로 엣사랑을 찿기를 시작을 했었던 겁니다.
당시 그녀는 짐에게 자신과 베트남에 남아서 같이 살자고 애원을 했었던 겁니다. 당시 그는 이러한 누엔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매몰차게 거절을 하면서 나는 여기서 살지는 못한다!! 라고 이야기를 했었는데 지금 생각을 해보면 무척 어리석은 자신이 원망스럽다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당시 그는 그러한 이야기를 하는 누엔의 이야기를 뒤로한체 택시를 타고 바로 아파트를 떠났으며 그런 자신의 뒷모습을 발코니에서 바라보는 누엔의 모습이 마지막 광경이었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셔츠 주머니에서 당시 아파트 주변이 담긴 사진 한장을 꺼내 들더니 한참 내려다 보고 있었던 겁니다.
지난 9월 64세의 어느 여인이 자신의 침대에서 아이패드를 보면서 전쟁으로 남겨진 Amerasian의 이야기를 담은 웹페이지를 보는 도중 소스라치게 놀랬었던 겁니다. 웹페이지 화면을 아래로 내리던중 그녀는 자신과 짐이 함께 찍은 한장의 사진이 자신을 얼음처럼 얼려버렸던 겁니다. 그러면서 처음 짐과 사랑을 나누었었던 옛기억이 오버랩이 되면서 충격을 받았었던 겁니다.
짐이 본국으로 귀환을 하고 1970년 12월 18일 누엔은 사이공 외곽 지대였었던 수용소로 보내졌었던 겁니다. 당시 그녀는 딸아이를 출산을 했었고 그녀는 딸아이에게 누엔 탄 누엔 더이 라는 이름을 지었던 겁니다. 그 딸아이의 이름의 뜻은 첫번째 눈물 이라는 내용으로 그렇게 지은 이유는 당시 내 주위에는 가족이 아무도 없었으며 무척 외로운 나날을 보냈었던 겁니다, 당시 그녀의 딸은 고아로 남의 가정에 입양을 했었고 그 가정이 지금 어디로 갔는지 몰라 현재 딸 아이와는 연락이 닿지를 않았던 겁니다.,
그러던 당시 그녀는 월남 정부 군대에 입대를 했었고 사이공인 함락이 되었던 1975년 4월 그녀는 수용소로 보내졌었고 그곳에서 2년 동안 강제 노역을 하고 74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났고 두 아이가 두고 살고 있었지만 남편은 지금 기동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중풍으로 병석에 누워 있는 겁니다. 그러는 와중에도 누엔은 딸아이를 찿는 것을 포기를 하지 않았던 겁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두고 떠나버린 짐을 원망을 하면서 살았던 겁니다.
아이패드에서 기사를 본 누엔은 그 내용을 올린 기자에게 이메일을 썼었고 그 이메일은 당사지인 짐에게 포워딩이 되자마자 이메일, 문자 메세지 영상 통화가 시작이 되었던 겁니다. 그러면서 누엔의 고향에서 지난 45년 동안 보지 못했던 첫사랑인 누엔과 짐의 극적인 장면이 기다리고 있었던 겁니다.
문이 열리자마자 짐의 첫마디는 " 다시 만나서 반갑다! 라는 이야기로 시작이 되었고 그녀는 그동안 참았던 눈물을 쏟으며 서럽게 울기 시작을 했었던 겁니다. 그동안 참았던 눈물이 서러움과 원망이 오버랩이 되었던 겁니다. 두 사람은 각자 의자에 앉아 인터뷰를 시작을 했었고 짐은 자신의 팔을 그녀가 앉은 의자 팔걸이를 잡고 가급적 그녀에게 가까워지려 했었으나 그 긴 기간동안 혼자 남겨지게 했었던 누엔을 생각해 미안함이 있었던지 가까이 가질 못했던 겁니다.
지금은 헤아진 그들의 딸아이를 찿자는데에 의견 일치를 보고 서로의 DNA를 채취를 하고 남겨진 Amerasian을 찿는 기관에 의뢰하기로 했었습니다. 잠시후, 그녀는 기자와의 이야기에서 현재 나의 감정은 원망과 반가움이 교차가 되었고 현재의 삶에 만족을 하고 있으며 현재 내가 짐에게 원하는 것은 잃어버린 자신의 딸아이를 찿는것에 도움을 주었으면 한다! 라는 말도 잊지를 않았습니다.
(다음엔 딸아이를 찿았다는 내용의 글이 포스팅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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